언제나처럼 회사 메일함과 서류들을 기계적으로 정리한다. 걸려오는 문의 전화에는 ‘이거라고 알고 있지만 저기에도 확인해 보셔야 한다’라는 책임 회피성 답변도 차분히 날려준다. 근무가 끝나고 퇴근 인파로 가득찬 지하철에 서둘러 몸을 구겨 넣으며 생각한다. 기술, 갖고 싶다!
생각의 출발점은 회사에 있었다. 의사라는 전문직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업종이라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교류하는지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의사가 기본적으로 익히는 의학지식이나 기술은 동일하다. 그러나 개개인이 겪는 임상 진료 경험과 관심있는 연구 주제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다보니 의사들이 모이게 되면 배우고 나눌 주제가 참 많았다. 같은 기술을 다루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경험과 지식, 감정을 공유한다. 나아가 개인의 발전과 더불어 집단의 발전을 추구한다. 그런 모습들이 근사하게 보였고, 또 부러웠다. 모두 다른 역량과 기술을 보유하기 때문에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가 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만의 기술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몸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만의 기술에 대한 갈증은 점점 깊어졌다. 오랫동안 고민을 한 끝에 '프로그래밍'에 도전하기로 결심했고, 학습에 몰두하기 위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처음에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이 마냥 설레고 좋았다. 그러나 인연을 끊고 살았던 공부를 다시 붙잡으려니 쉽지 않았다. 게다가 프로그래밍이란 기술의 전문가가 되자는 추상적인 목표 아래 홀로 공부를 시작하니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또래 친구들은 가정을 꾸리거나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에 무모한 도전을 한 건 아닌가 싶은 불안함도 있었다.
그렇게 슬럼프가 찾아오던 중에 '우아한 테크코스'를 알게 되었다. 그 안에는 내가 바라던 모습들 - 공유와 발전이 담겨 있었고, 환경도 준비되어 있었다.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2기 크루로 합류할 수 있었다.
교육은 '페어 프로그래밍'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교류를 토대로 진행되었다. 같은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빠르게 찾아온 것이다. 직접 부딪쳐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경험과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의견을 나눌 때 상대방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꼼꼼히 살피게 되었다. 전 직장에서는 협업이 거의 없어서 동료들의 표현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페어 프로그래밍은 페어와의 진실된 합의가 중요하다. 따라서 페어가 어떤 표현으로 본인의 의사를 드러내는지 최대한 잘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사람이란 존재의 다양성을 실감하고, 타인에 대한 존중심을 더욱 기를 수 있었다.
서로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눌 때는 즐거웠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로 페어에게 도움을 줄 때, 페어의 지식이 나에게 깨달음을 줄 때 같이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전 페어에게서 받은 지식을 현재 페어에게 공유할 때는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기술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 같아 만족스럽기도 했다.
게임을 하는 듯한 재미도 있었다. 합의가 잘 이루어지면 협동 게임의 한 단계를 가뿐하게 클리어한 느낌이 든다.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는 공격과 방어를 사용하는 전쟁 게임을 방불케 한다. 내 의견의 장점을 피력하고 페어 의견의 단점을 지적해서, 페어를 설득하는 것이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페어 프로그래밍의 가장 큰 강점은 자신의 부족한 점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페어와 회고를 통해 알게 되는 부족함도 있지만 스스로 느낀 단점이 참 많았다. 그 중에서도 빨리 고쳐야 되겠다고 다짐한 단점이 있었다. 바로 의견 충돌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때마다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 점. 논쟁이 길어지면 제출 기한에 대한 압박감이 심해졌다. 그래서 말로는 페어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척 했지만, 동시에 표정이나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런 태도는 나와 페어를 불편하게 만들고, 오히려 생산성을 저하시킬 뿐이다. 의견 충돌을 확실하게 해결하든지, 페어의 의견을 수용하자고 결심했으면 진심으로 받아들이자고 반성했다. 이외에도 고쳐야 할 태도와 습관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었다. 발견에만 그치지 않고 리팩토링 하듯이 열심히 개선해 봐야지!
사실 한 달 간 루터회관을 오가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원체 걱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고, 프로그래밍 실력도 부족하다보니 일정과 미션이 버거워서 힘들 때가 많았다. 해야될 건 많아 보이고, 시간은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우아한 테크코스 크루들의 열정 덕분이다. 회사원일 때는 수동적이다 못해 무사안일주의에 젖어 있었다. 나에게 할당된 일만 적당하게 끝내면 다른 요소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크루들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학습하고, 그 과정을 망설임없이 공유해 준다. 그런 모습들에서 느껴지는 열정을 통해 좋은 자극을 받고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앞으로도 크루들에게 많이 의지하고자 한다. 동시에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크루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결론적으로, 나의 우아한 테크코스 한 달 생활기는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 함께 가면 멀리 간다!